자아(自我)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있는 나' 혹은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나'라는 뜻입니다.
즉, '나'의 주인은 '나'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이나 의식을 말합니다.
이 자아란 것이 인본적으로 보면 줏대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교만의 극치인 죄성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는...
절대 통치권이 나 자신이기에, 주님이 개입할 여지를 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고자 한다면 이 자아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자아)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9장 23절)
성경의 기본 골자는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자아가 죽어야 하는 조건이 따릅니다.
하여,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자아의 죽음에 대해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아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십자가 복음의 본질을 매우 잘 알면서도
쫙쫙 달라붙는 끈적하고 달달한 육의 시스템에서 돌아서야 하기 때문에
내 자아가 죽어야 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지 않는 이유입니다.
즉, 포기하고 돌아서는 과정이 만만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둘째... 대부분의 교인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당당하게 주님을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백하면서도
내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도 없고 큰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과 다르게... 이 시대 가르침은 세상 불순물로 오염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고,
또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다 보니 당연하듯 흘러가는 것입니다.
교회당에 등록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이 내 구세주라고 신앙고백만 하면
누구든지.. 천국은 쉽게 간다고 하는 편리한 교리들이 쏟아지기 때문에
굳이, 꼭 내 자아가 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많은 교인이 자아의 죽음 없이, 그걸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은 주를 믿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 안에는 회개, 자기 부인, 거듭남,
은혜가 한 세트로 다 있다 하면서도 이방인들과 별 구별됨 없이,
여전히 자기가 주권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저 교리 이론만 가득합니다.
이처럼, 자아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으니,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에... 별 관심도 없고, 또한 감당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복음 말씀이, 삶 가운데 묻어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런 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지금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에 밟히는 처지가 됩니다.
이 시대 교회당과 교인들이 급속도로 소멸 감소되는 주원인입니다.
말세의 증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고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주님의 눈치는 안 보고 교인들끼리 눈치 보며 서로 잘 보이려는 모습들...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 기쁨이 없고, 믿는 게 믿는 것 같지 않은 뻑뻑함...
이 땅의 방식대로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고,
부러워 보이는데...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아직 십자가에 죽은 적도 없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반드시 십자가에 죽어야만 새 생명이 태동하는 종교인데,
십자가에 죽을 마음도, 관심도 없으니, 세상 것에 더 이끌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없다면... 어느 것 하나만 없는 게 아니라,
전부가 없는 것입니다.
내 자아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내 주도권을 포기하고 주님께 내 권리를 넘기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말로만 '나를 포기합니다'하는 건 쉬워도, 실상의 포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정말 포기하려고 해 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내 자아를 포기해야 합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영은 살아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죽음이 복음의 핵심이고, 그때부터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기 부인, 회개, 거듭남, 순종...
이 모두가 자아의 죽음에 연관된 영적 단어입니다.
말로만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이 있다고 한들 의미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의 증거가 있기 때문에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믿음의 진위 여부를)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진짜 믿음의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가짜 믿음의 사람)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좋은 열매든 악한 열매든)을 입(삶)으로 말함이니라(표현)"
(누가복음 6장 44~45)
온전한 믿음생활은...
그저 입술을 움직여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고,
잘 짜여진 교회당 예배를 열심히 다 참석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아의 죽음인... 회개와 거듭남의 십자가 통과만이 유일 해결책입니다.
내 자아가 죽어야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자아가)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1절)
죽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겠습니까...
아무리 거듭나도 마귀가 공중권세에 있는 한 자아는 매일 자극받기에
바울 사도처럼 날마다 죽어야 하므로, 초대교인들에게 당당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울처럼 자랑할 만한 게 많은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상적 자랑거리를 모두 배설물로 여길 뿐입니다.
바울 자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자아의 죽음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거룩한 자랑입니다.
자기 자아의 죽음을 위해 매일 죽는 것은 자랑할만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여 죽음을 맛본 사람은 날마다 죽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런 영성이 있는 사람은... 그래서 더 죽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랑이 내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주님의 임재가 있고,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통해 이 땅의 삶에서도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십자가 통과의 죽음은 처음이 고통스러울 뿐,
통과하면 기쁨과 감사만이 넘칩니다.
(거듭난)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장 11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을 내 심장으로 맛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여, 그분 신부로 천국 잔치에 참예하고 싶습니까...
그에 대한 유일무이한 방법은, 내 자아의 죽음(거듭남) 뿐입니다.
나는 쇠하고,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지면 그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내 죽음으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그분이 내 안에 사는 게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들이...
자아의 죽음으로 인해 내 영이 사는 모습입니다.
그 속사람 안에.. 화평과 안식이 있고, 기쁨과 사랑과 천국이 있습니다.
제발~ 꼭, 그 길을 가십시오... 부디~ 내 영이 사는 길을 가십시오...
간절히 권면 드립니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장 3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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