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란 존재는 참으로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은혜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은혜가 없으면 인류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으로 숨 쉬는 것과 먹는 것 그리고 이 좋은 환경에서
누릴 수 있는 조건은 다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다못해 들에 여기저기 솟아나는 들풀도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흙과 공기와 수분과 햇빛이 공급되어
잘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주님께서 은혜로 먹이시는 위대한 역사입니다.
그럼,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우리가 믿음 생활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의 에너지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밥을 굶으면 기력이 떨어져 며칠을 견디기 힘든 것처럼
사람의 영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공급되지 않으면 영적인 허기로
견딜 수 없는 영적 기아 상태가 찾아와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모습에서
육의 속성으로 돌아가려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 진정한 믿음의 상태가 되면
매일매일 끝도 없이 주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견딥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은 그 은혜의 빈공 상태가 두려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쉬지 않고 매일 기도하는 모습이 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그에 합당한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아무런 변화도 없이 육의 속성이 그대로라면 거듭난 것도 아니오,
그것은 은혜받았다고 착각할 뿐 은혜가 부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연료가 없으면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고급 승용차라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 무늬만 화려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화려한 신학의 지식이 있다 한들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에 의하여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된 열매가 없다면
입술과 지식에 의존하여 은혜와 믿음을 주장할 뿐입니다.
즉, 그냥 이론만 탐구하고 설명하는 지식인에 불과합니다.
맛있는 음식은 직접 먹어보고 음미해야 그 맛을 분명히 알듯
은혜 역시 실제 주님으로부터 부어져 봐야 그 참맛을 압니다.
실질적 은혜가 부어짐의 경험 없이 은혜를 설명하는 것은
음식을 맛보지 않고 음식 맛을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의 오남용에 대하여 경계할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어떤 안수집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은 험하게 운전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저도 그분의 차에 한 번 동석했다가 매우 놀라서
그다음 부터는 절대 동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들이 자동차 사고를 달고 다닙니다.
어느 날 구역예배를 드린 후,
어느 식당에 가서 식사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오토바이와 승용차가 서로 먼저 우회전하려다가
접촉사고가 난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니 그 안수집사님의 차였습니다.
상황을 보니 분명 안수집사님이 잘못한 것이고,
같은 상황에서 오토바이와 승용차가 접촉하면
승용차에 더 과실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안수집사님은 식사하면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기도 부탁을 하는 겁니다.
일주일 후 다시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간증을 한다고 하면서
일주일 전 사고에 대하여
경찰에서 잘 해결이 되어 오토바이 운전사에게
과실로 돌아가게 되었다면서 기뻐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여러분들이 기도해줘서 잘 해결되었다며
감사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건 은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주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자신이 유리한 대로 막 적용합니다.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은혜에 대하여 종종 오용하여 가르치는 사례가 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에 보혈 피의 은혜가 필요하다.'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없기에 은혜가 존재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도를 자세히 뜯어보면
주님의 말씀을 상징적으로만 가볍게 여기기에 애초에 지킬 마음도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함도 없이 보혈 피로 슬그머니 무마하고,
은혜를 앞세워 자신의 육적 속성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게 은혜를 앞세워 자기 죄성에 방어막을 치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은혜 은혜' 하는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에서 벗어나
은혜를 잘못 남용하는 것에 대하여 솔직히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죄를 은폐하기 위한 특혜로 그런 은혜를 주신 적도 없고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사람에 의하여 교리로 전해지는 유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보충해주는 연료입니다.
은혜는 아무리 우겨쌈을 당해도 고난을 견디는 힘을 줍니다.
은혜는 내 원수도 사랑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은혜는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근원입니다.
은혜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날선 무기입니다.
은혜는 내 영이 세상적 삐걱거림에서 벗어나게 하는 윤활유입니다.
은혜는 부득불 죄를 지어도 바로 회계로 인도하는 양심의 찔림입니다.
은혜는 주님을 더욱 높이고 사랑하기 위한 영적 아드레날린입니다.
은혜는 나에게서 튀어나오려는 육의 속성을 잠재우는 차단막입니다.
은혜는 내 이웃을 더욱 긍휼과 사랑으로 이끄는 모터입니다.
은혜는 잠자는 영을 깨우는 기상나팔입니다.
은혜는 좁은 문, 좁은 길, 순종, 회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능력입니다.
하다못해,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고난조차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은 도무지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간절히 주님을 찾고 찾아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으로부터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결코, 애통한 회개도 없이
이 글 윗 부분에서 언급했듯 내 죄에 대하여 슬며시 가리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내 죄를 은근슬쩍 무마하기 위한 면책특권이 아닙니다.
"에이~ 사람은 근본이 연약한데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아!!!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지 안그래?"
이 말은 마귀가 하와를 미혹할 때처럼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로 유도하고, 회개할 맘도 없게 하며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은혜를 철저히 왜곡하고,
무력화시키는 마귀의 무서운 속삭임 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사람은 연약하기에 은혜가 필요하다고 늘 부르짓으면서
교회 헌금으로 구제사역에 안 쓰고 멀쩡히 있는 집 놔두고
또 다른 큰 아파트를 구매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고도 떳떳합니다.
잘못된 은혜의 적용이 얼마나 무서운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양심을 마비시켜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가리고 정당화시켜줄 목적으로 은혜을 주신 적 없습니다.
오히려 죄를 회개한 자에게 용서하는 은혜를 주실 뿐입니다.
보혈 피의 은혜는 자기를 부인 회개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이지,
회개도 없이 계속 죄에 머물려는 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붙들린 사람은 은혜 없이는 심령이 하루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철 따라 내리는 비와 햇빛이 잘 공급되는 곳에서는 곡식이 잘 자라지만
추운 극지방이나 비가 없는 사막 지대에서는 곡식이 자랄 수 없듯
우리의 영이 잘 성장하도록 환경을 베풀어주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내가 영적 게으름으로 가만히 있어도 자동으로 공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매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요청의 행위를 다른 표현으로 '기도'라 합니다.
은혜를 내 유리한 대로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마귀들이 무차별 공격합니다.
바울은 사람을 이용한 마귀의 무차별 공격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꿋꿋하게 견디며 사명 감당을 잘 해낸 분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마귀에 의하여 육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계속 올라옵니다.
은혜가 없으면 영이 잠들어갑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말라죽듯
믿는 사람들은 은혜가 없으면 영이 말라갑니다.
이것은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 상황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숨 쉬는 한, 계속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고, 은혜 없는 신앙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도 집을 나서기 전... 잠들기 전... 언제 어디에 있든 수시로...
부디~ 내 영이 마귀의 악한 역사로부터 보호받도록 은혜를 구하십시오.
은혜를 받아야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신고하기